Skip to content
athros
Go back

기차는 가장 먼 길로 간다 ②: 시카고에서 다시 동쪽으로

「기차는 가장 먼 길로 간다」 2편. 이 글은 2025년 9월의 개인 여행 기록과 당시의 기억을 바탕으로 썼다.

기차 여행은 시간을 내 뜻대로 쓰는 여행이 아니다. 출발 시각과 도착 시각은 분명 표에 적혀 있지만, 기차는 그것을 약속이라기보다 포부쯤으로 받아들이는 듯하다. LA를 떠난 열차가 시카고에 닿았을 때도 그랬다. 거의 세 시간 늦었다.

그래도 이상하게 연착이 여행 전체를 망치지는 않았다. 불편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세 시간은 시계를 자꾸 확인하기에 충분히 긴 시간이다. 다만 며칠째 기차의 리듬에 몸을 맡기고 있으니, 기다림까지 풍경과 식사와 다음 계획 사이에 섞여 버렸다. 암트랙을 타면서 정시성까지 완벽하기를 바라는 것은, 내가 조금 욕심을 부리는 일인지도 몰랐다.

늦게 닿은 시카고

연착 끝에 도착한 시카고 유니언 스테이션 플랫폼

시카고는 처음 보는 도시도, 그렇다고 잘 아는 도시도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에번스턴은 내가 노스웨스턴대에서 포닥을 하며 살았던 곳이다. 하지만 그때는 마음에도 지갑에도 여유가 없었다. 시카고를 충분히 즐길 틈도 없이 연구실에 처박혀 일만 했다.

그 시절의 나에게 시카고 유니언 스테이션은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곳이었다. 시카고 근처에 살면서도 시카고를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조금 우습다. 도시와의 인연이 거의 주소에만 머물렀던 셈이다.

메이저리그 구장 30곳을 모두 가보겠다는 내 버킷리스트에서 가장 아쉬운 곳도 시카고 컵스의 리글리 필드다. 전철을 타면 금방이고 입장료도 그렇게 비싸지 않았는데, 그때는 뭐가 그렇게 여유가 없었던지. 가까운 야구장은 언제든 갈 수 있을 줄 알았고, 연구실 일은 언제나 오늘 해야 할 것 같았다. 결과는 야구장만 남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시카고에 도착해 환승하는 짧은 시간마저 낯설고 반가웠다. 오래전 가까이에 두고도 지나쳐 버린 도시를, 가장 먼 길을 돌아 다시 만난 느낌이었다.

시카고 거리에서 올려다본 윌리스 타워, 옛 시어스 타워

이번에는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뒤에 선 건물은 윌리스 타워, 내게는 아직도 시어스 타워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 그 건물이다.

시카고에 도착한 뒤에는 다운타운 H-mart에서 따뜻한 국수 한 그릇을 먹었다. 맛이 특별히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긴 이동 끝에는 미각보다 온도가 먼저 사람을 위로할 때가 있다. 따뜻한 국물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반가웠다.

시카고 H-mart에서 먹은 순두부 칼국수

다음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암트랙 라운지에도 들렀다. 생각보다 편안했다. 며칠째 움직이는 방에서 지내다가 움직이지 않는 의자에 앉으니 그것만으로도 새로운 체험 같았다. 다시 출발하기 전의 대기마저 여행의 한 장면이 되었다.

라운지에 놓여 있던 시카고 유니언 스테이션 개관 안내

쾌적했던 시카고 유니언 스테이션 암트랙 라운지

시카고 유니언 스테이션은 LA 유니언 스테이션보다 훨씬 크고 웅장했다. 좀 더 구석구석 둘러보고 싶었지만, 마침 무슨 행사가 진행되고 있어 그러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예전에는 연구실 때문에 못 보고, 이번에는 행사 때문에 못 봤다. 시카고와 나는 아직 조금 더 친해질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행사가 한창인 시카고 유니언 스테이션 대합실

갈라 행사로 가득 찬 시카고 유니언 스테이션 대합실

웅장한 대합실은 맞았지만, 그날은 행사가 한창이었다. 역을 구경하러 왔다가 갈라의 곁방 손님이 된 셈이다.

시카고 유니언 스테이션 트랜싯 센터 앞 풍경

시카고는 목적지가 아니라 환승지였다. 하지만 여행에서는 환승지에도 얼굴이 생긴다. 연착, 국수, 라운지, 그리고 다시 들고 가야 할 짐. 그 조각들이 모이자 시카고는 지도 위의 점이 아니라 내가 실제로 머문 시간이 되었다.

다시, 야간열차

뉴욕행 기차에 올라탔다.

뉴욕행 야간열차 탑승을 기다리는 줄

시카고 유니언 스테이션 지하 승강장으로 향하는 길

밤의 시카고 유니언 스테이션 지하 승강장

뉴욕행 암트랙 열차의 마지막 객차

이번 객실에는 개인용 세면대와 변기가 있었다. 편의와 공간 절약이 아주 가까이 붙어 있는, 앞선 열차와는 또 다른 생활 방식이었다. 짐을 정리하고 간단히 한 잔 마신 뒤, 밤 11시쯤 잠자리에 들었다.

뉴욕행 침대칸의 개인용 세면대와 변기

뉴욕행 침대칸의 잠자리

기차에서는 잠도 이동이 된다. 침대에 누운 뒤에도 열차는 계속 달리고,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다음 도시가 가까워진다. 이보다 생산적인 수면이 또 있을까. 다음 날 아침에도 잘 잤다. 눈을 뜬 뒤 기차에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는 기분은 두 번째인데도 여전히 좋았다.

뉴욕으로 바로 내려가는 줄 알았던 열차는 업스테이트 뉴욕의 Albany–Rensselaer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맨해튼 쪽으로 내려왔다. 가장 빠른 길만 찾는 사람에게는 조금 이상한 동선이겠지만, 기차는 원래 그런 식으로 나를 데려간다.

업스테이트 뉴욕의 Albany–Rensselaer 역에 정차한 뉴욕행 열차

Albany–Rensselaer 플랫폼에서 잠시 쉬는 시간

잠시 정차한 동안 플랫폼에 나와 몸을 폈다. 기차여행의 휴식은 이상하게도, 다시 기차에 오르기 위해 있다.

예전에 운이 좋아 비행기 비즈니스석을 탄 적이 있다. 기내에서 다리를 쭉 뻗고 잘 수 있으니 몸은 편했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편하지 않았고 비행기 소음도 너무 시끄러웠다. 반면 기차에서 밤을 보내는 느낌은 참 좋았다. 물론 기차 소음이 거슬리는 사람도 꽤 있겠지만, 내 귀에는 소음보다 리듬에 가까웠다. 비즈니스석보다 기차 침대가 더 잘 맞는 몸이라니, 취향도 제법 경제관념 없이 자란다.

창밖 풍경도 조금씩 달라졌다. 뉴욕에 가까워질수록 나무에는 가을빛이 돌기 시작했다. 9월의 끝자락, 기차가 동쪽으로 달리는 동안 계절도 창밖에서 조금씩 옷을 갈아입는 것 같았다. 비행기 창으로는 놓쳤을 변화였다.

펜역의 첫 장면

뉴욕 펜역에 도착해 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가는데, 앞에 있던 한 노인이 갑자기 쓰러졌다. 시카고 유니언 스테이션에서 기다릴 때 메츠 모자를 계기로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던 바로 그 노신사였다. 나는 그분이 크게 다치지 않도록 돕고, 가방을 챙겨 자리에 앉으실 때까지 곁에 있었다. 정신없는 도착의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따님이 데리러 오신다기에 옆에서 기다리겠다고 했지만, 굳이 가도 된다고 하셔서 발걸음을 옮겼다. 자칫하면 길고 높은 에스컬레이터 아래로 굴러떨어져 큰 사고가 날 수도 있었던 아찔한 상황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낙상이 정말 무서운 일이구나 싶었다. 그래서 내게 남은 뉴욕의 첫 장면은 화려한 스카이라인이 아니라 그 짧고 무거운 긴장이었다.

뉴욕 모이니핸 트레인 홀의 유리 천장과 시계

상황이 정리된 뒤 역 밖으로 나왔다.

모이니핸 트레인 홀 출입구

해 질 무렵의 뉴욕 펜역 외관

길고 느린 여정의 끝이었다. LA에서 출발해 시카고를 거치고, 며칠 동안 먹고 자고 창밖을 보며 달린 뒤에야 뉴욕에 닿았다. 비행기였다면 몇 시간 만에 건너뛰었을 거리를, 나는 여러 날에 걸쳐 몸으로 통과했다. ‘도착했다’기보다 ‘마침내 다 지나왔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짧은 뉴욕의 밤

맨해튼에서 저녁을 먹고 하이라인을 걸었다. 피곤해서 오래 걷지는 못했지만, 오랜만에 온 뉴욕의 밤은 여전히 사람과 소리와 빛으로 가득했다. 기대했던 식사는 기대만큼은 아니었고, 거리 풍경은 때로 지저분하고 거칠게 느껴졌다. 뉴욕은 도착했다고 해서 무조건 환영 공연을 해주는 도시는 아니었다. 그래도 그 무심함까지 꽤 뉴욕다웠다.

뉴욕 하이라인에서의 밤 산책

하이라인에서 만난 거대한 비둘기 조형물

밤의 베슬

뉴욕에서는 비둘기도 스케일이 달랐다.

뉴욕 한인타운에서 먹은 뜨끈한 국물

다음 날 아침에는 라과디아 공항으로 가야 했다. 택시 요금이 예상보다 높아 대중교통을 택했다.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터미널로 가는 길을 잠깐 헤매기도 했다. LA에서 시카고를 거쳐 뉴욕까지 잘 찾아온 사람이 공항 앞에서 잠시 방향을 잃었다. 여행은 끝날 때까지 자만을 허락하지 않았다.

라과디아 공항으로 가는 뉴욕 지하철

라과디아 공항으로 가는 버스

라과디아 공항 터미널 C에 도착한 길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정답처럼 짜인 이동보다 낯선 도시에서 잠시 길을 찾는 일이 여행에는 더 잘 어울렸다.

가장 먼 길로 가는 이유

뉴욕에서 낙스빌로 돌아오는 비행기는 다시 빠른 이동으로 복귀하는 길이었다. 며칠에 걸쳐 건넌 거리를 몇 시간으로 압축해 돌아가니, 문명은 참 편리했고 조금 싱거웠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의 기차 여행이 끝났다.

돌아보면 이 여행의 핵심은 대단한 관광지가 아니었다. 침대에서 본 해돋이, 식당차의 낯선 대화, 생각보다 길어진 연착, 시카고의 짧은 대기, 가을빛이 돌기 시작한 창밖, 그리고 펜역에서의 순간. 비행기로 갔다면 목적지와 함께 통째로 건너뛰었을 시간들이었다.

기차는 가장 빠른 길로 가지 않는다. 정시에도 꼭 집착하지 않는 듯하다. 대신 내가 지나가는 거리와 시간 안에 오래 머물게 한다. 창밖을 멍하니 보는 동안 생각은 느려지고, 마음에는 조금씩 빈자리가 생겼다.

나는 1,460달러를 내고 가장 느린 길을 샀다. 그때의 내게 그 느림은 낭비가 아니라 여유였고, 사치라기보다 위로였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가 정말 원하던 여행이었다.

작성 과정: 이 연재는 ChatGPT-5.6 Terra와의 인터뷰로 사실과 기억을 정리하고 초안을 구성했으며, ChatGPT-5.6 Sol의 문장 편집을 거쳤다. 경험의 사실 확인과 최종 공개 결정은 작성자가 했다.



Previous Post
인간관계론 읽기 ①: 전쟁터에 나간 뒤 총 쏘는 법을 배우는 사람들
Next Post
기차는 가장 먼 길로 간다 ①: 기차를 타러 비행기를 탔다